- 나레이션 지금 저는 동네 이발소 의자에, 하얀 보자기를 두르고 앉아 있습니다.
- 나레이션 네. 앞머리는 원래도 별로 없습니다. ♪boing
- 나레이션 아들 질문 하나에 이렇게 됐습니다. 어젯밤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. fx:flash · ♪rewind
- 나레이션 지난번 시장에서 피해 갔던 그 질문이, 어젯밤 샤워할 때 더 구체적으로 돌아왔습니다.
- 아이 아빠, 왜 아빠는 고추에 털이 있어요? fx:zoom
- 아이 나는 없는데.
- 나레이션 샤워기 물소리만 들렸습니다.
- 아빠 어... 그게... 어른 되면 나. ♪boing
- 아이 왜요?
- 아빠 어... 비누! 비누 어디 갔지? ♪boing
- 나레이션 그날 저는 비누를 세 번 찾았습니다. 비누는 계속 제 손에 있었고요.
- 나레이션 그리고 오늘, 그 질문이 이발소에서 다시 나왔습니다.
- 아이 할아버지! 아빠는 왜 고추에 털이 있어요? 당김:아이
- 아이 어제 물어봤는데, 아빠가 비누만 찾았어요. ♪dudung
- 아빠 아, 할아버님. 애가 아직 뭘 몰라서...
- 나레이션 제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, 아이가 한 발 더 나갔습니다.
- 아이 그럼 할아버지는 왜 머리에 털이 없어요? ♪dudung · 당김:아이
- 나레이션 이발소가 두 번째로 조용해졌습니다.
- 나레이션 할아버지가 수건을 데우러 간 사이, 저는 보자기를 머리끝까지 올리고 휴대폰을 켰습니다.
- 다큐 톤 아빠라는 생물은, 궁지에 몰리면, 보자기 속에서도 검색을 한다. 당김:아빠
- 나레이션 헷갈릴 만합니다. 뼈가 몇 개인지는 배웠어도, 털이 왜 나는지는 안 배웠거든요.
- 나레이션 오히려 감정으로 배웠죠. 밀어야 하는 것, 민망한 것. 그래서 아이가 물으면 대답보다 '쉿'이 먼저 나옵니다.
- 나레이션 오늘은 쉿 대신 세 가지만 봅니다. 털은 왜 나는지, 왜 하필 거기인지, 왜 어떤 데선 빠지는지. fx:zoom
- 나레이션 햇빛에 비추니까 보였습니다. 아이 팔에도, 털이 빽빽했어요. fx:zoom
- 나레이션 사람 몸에는 털집이 오백만 개쯤 있습니다. 손바닥, 발바닥, 입술만 빼고 거의 온몸에요. 침팬지랑 크게 다르지 않은 수입니다.
- 나레이션 그럼 사람은 왜 털을 가늘게 바꿨을까요.
- 나레이션 가장 많이 나오는 설명은 땀입니다. 털이 가늘어야 땀이 잘 말라서, 한낮에도 오래 걷고 뛸 수 있었다는 거죠. 정설은 아닙니다.
- 나레이션 어쨌든 인류는 털 대신 땀을 얻었습니다. 저는 그 능력으로, 주로 버스를 잡습니다. ♪boing
- 나레이션 남은 털 중에는, 맡은 일이 분명한 털이 있습니다. 지키는 털이요. ♪page
- 나레이션 머리카락은 햇볕을 막고, 눈썹은 땀을 옆으로 흘려보내고, 속눈썹은 먼지 경보기, 코털은 필터입니다.
- 아이 으히히! 간지러워요!
- 나레이션 털 한 올 한 올이, 아주 작은 더듬이였던 겁니다.
- 나레이션 반대로, 하는 일이 거의 없어 보이는 털도 있습니다. 흔적만 남은 털이요. ♪page
- 나레이션 소름이 돋는 건 털집마다 털을 세우는 작은 근육이 있어서인데, 고양이는 그걸로 두 배로 커 보이고, 사람은 피부만 도돌도돌해집니다.
- 나레이션 털을 세우던 장치만, 남은 거예요.
- 나레이션 그럼 왜 머리카락만 길게 자랄까요. 굵기가 아니라, 자라는 기간이 달라서입니다.
- 나레이션 머리카락은 이 년에서 칠 년을 자라고, 눈썹은 몇 달이면 멈춥니다.
- 나레이션 이제 아이가 진짜로 물어본 것. 어른이 되면, 왜 하필 거기에 털이 날까. ♪page
- 나레이션 할아버지는 면도 거품으로 거울에 사람을 그리시더니, 거기는... 거품으로 덮으셨습니다. fx:zoom
- 나레이션 몸이 자랄 때가 되면 호르몬이 나오고, 그 자리에 원래 있던 솜털이 굵은 털로 바뀝니다. 새로 나는 게 아니라, 굵어지는 거예요.
- 나레이션 보통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 무렵. 빠른 아이도, 늦은 아이도 다 정상입니다.
- 나레이션 그럼 왜 하필 겨드랑이고, 왜 하필 거기일까. 여기서 제일 놀랐습니다.
- 나레이션 땀샘은 두 종류입니다. 하나는 온몸에 깔려서, 물 같은 땀을 피부 밖으로 바로 내보내요.
- 나레이션 다른 하나는 겨드랑이, 사타구니, 귓속 같은 몇 군데에만 모여 있습니다.
- 나레이션 그리고 이 땀샘은, 피부 밖이 아니라 털집 안으로 나옵니다. fx:zoom
- 나레이션 털이 먼저가 아니었어요. 그 자리에 특별한 땀샘이 있고, 털은 그 짝입니다. 양초 심지처럼 땀을 붙잡았다가 천천히 퍼뜨려요. 그래서 알리는 털.
- 나레이션 이 땀은 원래 냄새가 거의 없고, 냄새는 그걸 먹은 피부 세균이 만듭니다. 정확히 무엇을 알리는 신호인지는, 과학자들도 아직 다투는 중이에요.
- 나레이션 그리고 이 땀샘도 사춘기에 맞춰 켜집니다. 털과 샘이 한 세트예요.
- 아이 할아버지는 가슴에도 털이 엄청 많아요! 당김:아이
- 아이 아빠는 가슴에 털 별로 없는데.
- 나레이션 맞는 말씀입니다. 가슴털은 호르몬 양보다, 털집이 얼마나 민감한지와 타고난 유전자에 크게 달려 있어요. 그래서 가족끼리 닮고, 동아시아 사람은 평균적으로 몸털이 적은 편입니다.
- 나레이션 가슴털이 많다고 더 남자다운 것도, 없다고 덜한 것도 아닙니다.
- 아빠 ...그렇죠, 할아버님?
- 나레이션 흔한 대머리는, 대부분 같은 호르몬 이야기입니다.
- 나레이션 남성호르몬이 몸속에서 더 센 형태로 바뀌면, 턱과 가슴에서는 털을 굵게 만들고,
- 나레이션 정수리와 앞머리에서는 거꾸로, 털을 점점 가늘고 짧게 만듭니다. 결국 솜털처럼 돼요. fx:zoom
- 나레이션 옆머리와 뒷머리는 이 신호를 별로 안 타서, 말굽 모양으로 남습니다. 모발이식 때 뒷머리를 떼어 옮기는 것도 그래서예요.
- 나레이션 이 관계를 밝힌 사람이 1940년대 미국 학자 제임스 해밀턴이고, 대머리 단계표에 지금도 그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.
- 나레이션 민감한 정도는 유전입니다. 외할아버지를 보라는 말은 반만 맞아요. 엄마 쪽 유전자 하나가 크지만, 아빠 쪽 유전자도 여럿 섞입니다.
- 나레이션 저는 그 말을 듣고, 거울 속 제 정수리를 오래 봤습니다.
- 나레이션 실제로 1928년 실험에서도, 안 굵어졌습니다.
- 나레이션 정리하면 이렇습니다.
- 나레이션 털은 없어진 게 아니라, 가늘어진 겁니다. ♪stinger
- 나레이션 그리고 때가 되면, 자리마다 다른 스위치가 켜집니다. 어떤 자리는 굵어지고, 어떤 자리는 거꾸로 가늘어지고요.
- 나레이션 머리를 다 깎고, 이발소 앞에 아이랑 섰습니다. 어젯밤 못 한 대답을 하려고요.
- 아빠 어제 아빠가 어른 되면 난다고만 했지. 그거 대답이 아니었어.
- 아빠 아까 햇빛에 비춘 네 팔 기억나? 너도 온몸에 털이 있어. 아주 가늘 뿐이야.
- 아빠 몸이 자랄 때가 되면, 그 가는 털 몇 군데가 굵어져. 이제 어른 몸으로 자랄 준비를 한다는 신호야.
- 아빠 왜 하필 거기냐면, 거기엔 특별한 땀샘이 있는데 그 땀이 털 나는 구멍으로 나와. 그래서 털이 짝으로 같이 나는 거야.
- 아빠 더러워서 나는 것도, 부끄러운 것도 아니야.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자리야.
- 아이 그럼 나는 언제 굵어져요?
- 아빠 그건 아빠도 몰라. 네 몸이 알아. 빨라도 괜찮고, 늦어도 괜찮아.
- 아이 몸이 알아요?
- 아빠 응. 몸이 알아.
- 아빠 그리고 하나만 약속하자. 몸이 궁금하면 언제든지 아빠한테 물어봐. 부끄러운 질문 아니야.
- 아빠 대신 다른 사람 몸 얘기는 큰 소리로 하지 않는 거야. 그건 그 사람 거니까. 오늘 할아버지는 웃어 주셨지만, 다 그렇진 않거든.
- 아이 그럼 할아버지한테 죄송하다고 해야 돼요?
- 아빠 응. 그게 좋겠다.
- 나레이션 아이가 이발소 문을 열고, 다시 들어갔습니다.
- 아이 할아버지, 아까 머리 얘기 크게 해서 죄송해요.
- 나레이션 아이가 몸에 대해 물으면, 비누 찾지 마시고 한번 대답해 보세요. 생각보다 재미있습니다.
- 아이 아빠, 근데 그럼 아빠 머리는 언제 다시 굵어져요? 당김:아이
- 아빠 ...저녁 늦겠다. 빨리 가자. ♪boing
- 아이 아빠, 같이 가요!
- 나레이션 다음 편은, 아이가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갔다가 던진 질문입니다.
- 아이 의사 선생님이랑 약사 선생님이랑 간호사 선생님은 뭐가 달라요?
- 나레이션 저는 그 전에, 또 검색 좀 하고 오겠습니다.